그다지 바쁜일이 없을 것 같은 초가을 텃밭인데...
태풍이 남겨놓고 간 무지막지한 횡포의 잔재 때문에
태풍이 떠난 후, 본의아니게 먼동이 트자마자 텃밭으로 나가게 되었다.
오늘은 24절기중의 열다섯번째 절기인 '백로'이다.
백로(白露)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이때 쯤이면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서 풀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른 아침의 텃밭은 찬이슬이 비가 내린 것 처럼 흠뻑 내려 앉았기에
차거운 물 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 처럼 느껴지는 찬기운은...
어느새 계절은 알게모르게 성큼 가을속으로 깊숙이 들어 앉은듯 했다.
생각할때는 이른 추석이라서 꽤 더울것 같았지만
찬 이슬이 내려앉는 계절이라는 것이
영락없는 전형적인 가을임을 속일수는 없는 것 같았다.
일 할 것이 있으면 미뤄놓지 못하는 못된 성격에
체력이 고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매달렸던 텃밭은
나의 극성스러움 때문에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춰진듯 했다.
태풍의 흔적이 곳곳에서 골칫덩이가 되었기 때문에, 낫을 들고 밭 주변을 정리하다가
풀숲에 곤드레꽃이 예쁘게 피어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충 일으켜 세우니 곤드레꽃도 봐줄만 할 정도로 예뻐보였다.
거센 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제멋대로 쓰러진 상추도
혼자서 일어나보려고 안간힘 쓰는 것이 엿보였다.
요즘 상추값이 금값이라는데...
뽑아내지 못하고, 쓰러진채로 상추를 뜯어다 먹을 생각이다.
참 애써 가꾼 여름 상추였는데, 몇번 뜯어다 먹고 뽑아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그동안 시도때도 없이 내렸던 잦은 비가 상추를 웃자라게 한 것도
자연의 휭포였음에 바람과 비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할런지 하소연 해본다.
가을 전어가 횟집에 나오는 초가을이다.
회는 그다지 좋아 하지 않지만, 봄 도다리와 가을 전어는 꼭 먹게 된다.
한번 정도는 깻잎에 싸서 가을 전어회를 먹어보려고
깻잎도 살살 아기 다루듯 일으켜 세웠다.
얘들아 그만 일어나거라" 속삭여보기도 했다.
커다란 망치를 들고 이른 아침부터 쾅쾅...
고추 지지대를 잘 박아 놓는 것도 내가 할일이었다.
덕분에 쓰러진 고추나무들도 일으켜 세우니 제법 건강하게 보여졌다.
추석때 부추전을 부쳐야겠기에
흠뻑 이슬이 내린 부추밭에서
부추를 자르다보니 비를 맞은 부추를 자르는 느낌이었다.
찬물에 손을 담근 느낌이 서늘해서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부드럽게 자란 부추에서
먹음직스런 부추향기가 코 끝을 자극했다.
차례상에 올려질 부추전을 직접 뜯어서 한다는 것이 즐거움인듯 했다.
거센 비 바람을 맞고 엉망진창이 되었던
가을무우밭에서 야채 하나 하나 흙을 돋아주고, 영양제 뿌려주고
온갖 정성을 들였더니
태풍이 떠난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는데,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장배추 39포기 중에서 3포기는 태풍과 함께 날아갔다.
남은 것 36포기 중에서 컵을 씌운 배추는 응급처치 해놓은 것이다.
시름시름 하니까 이렇게 저렇게 정성을 쏟으면
예쁘게 자라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다 죽어가는 가지나무 3그루를 살려보겠다고 애써보는 중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무줄기 사이에서 새순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서리가 내리려면 3개월도 더 남았으니까 희망이 보였다.
늦가을 까지 보라색 꽃을 피우는 모습이 예뻐서
꽃을 보기 위한 나의 노력을 알아줄런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살려보려고 노력중이다.
쓰러진 대파도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추석이 지나고 밭에 나가보면, 거의 일어서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몽땅 쓰러져서 뒹굴던 산나물들이 천천히 일어나는 연습을 하는듯 했다.
일으켜 세우기에는 키가 너무 커서 버거웠는데
지들이 알아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이 대견해 보였다.
그냥 낫으로 몽땅 베어버리고 싶지만
종족번식을 위해 꽃은 피워야 한다는 법칙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참취꽃
보라빛 꽃은 방아(배초향)꽃이고, 하얀꽃은 부추꽃이다.
태풍이 휩쓸었을 때는, 그냥 주저앉고 싶을 만큼 막막했던 텃밭인데
태풍이 사라진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역력하게 보여지는 채소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추석 차례 준비 한다고, 방치 해놓는다면, 얼마나 몹쓸짓인가를 생각하니
내 체력이 바닥이 날지언정 녀석들 살려놓는 것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것도 내가 사는 방법속의 하나이기에 ,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웃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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