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7번 국도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역사 체험장이다.
사찰, 왕릉,유적지...등 많은 것들이 곳곳에 있었건만, 그동안 숱하게 7번 국도를 다니면서도
눈여겨 보지 않았음은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장사를 해대는 경주시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차장, 그리고 유적지와 사찰 입구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은
다른 지방으로 여행 했을 때와 엄청나게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선덕여왕 릉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 79-2
선덕여왕릉 가는 길이라고 쓰여진 주차장에서 약 1km정도의 산길을 걸어가면
선덕여왕릉에 도착하게 된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의 호젓함과 경주 낭산이 전해주는 시원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가다보니
멀리 소나무 사이로 선덕여왕의 릉이 보인다.
선덕여왕릉(사적 182호)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한 선덕여왕릉은 둘레가 73m정도의 판이한
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재위 16년간 분황사와 첨성대를 세웠고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 건축의 금자탑을 아루기도 하였다.
또한 뒷날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 같은 영웅호걸을 거느리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러나 여왕이라는 약점 때문에 왕권이 불안하여 재위 말년에 비담,염종의 난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 사망하였다.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에 만난 청미래덩굴의 열매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 하는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고대답하였고, 이 기슭에 여왕의 시신을 장사 지낸지 300년만에 밑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다.
신문왕릉으로 들어가는 홍례문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
신문왕릉'은 사적 181호이며, 길이는 29,3m 높이는 7,6m 삼국사기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돌아가시자
시호를 '신문(神文)'이라고 하고,낭산 동쪽에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경주 낭산 (경주시 배반동 214-2) 사적 163호
누에고치 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낮은 구릉을 이루는 이 산은 신라 신성왕12년 (413) 부터 신성하게
여겨져 성역으로 보존되어 온 곳이다.
기록에는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니는 곳이니
당연 복을 주는 지역이다.
이제 부터는 낭산의 나무 한 그루라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릉을 비롯하여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 터,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진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구황리 삼층석탑,황복사지 등 신라 유적이 많다.
신문왕(681~692)은 신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맏아들로 재위 12년동안 관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의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동해바닷가에 '감은사'라는절을 창건하였다.
경주 괘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인 7번 국도에서
안내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진 좌 우에 화표석 ,문인석,무인석(武人石)과 돌사자들을 세워 놓은것이 이색적이다.
문인석(文人石)의 모습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유독 눈길을 끈다.
인상이 귀엽다고 표현하고 싶어지는 돌사자의 모습
경주 괘릉(사적 제 26호)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이 능은 제 38대 원성왕 (元聖王, 재위 785~798 김경신)을 모신 곳이다.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로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 십이지신상,난간,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각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괘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관을 걸어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