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번지 봉미산 산자락에 있는 '신륵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 말사이며, 전통사찰로 지정된 천년고찰이다.
대부분 사찰은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으나 신륵사는 유일하게 남한강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을 수 있는곳에 위치해 있어서 불자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 가는 곳이다.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무슨 공사를 하는지 찾아 갔을때는 일주문에서 매표소 입구까지 통행에 불편을 줄 정도로 길이 어수선했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심한 바람과, 흙먼지, 그리고 흙탕물이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았던
신륵사의 첫인상을 잊을 수 없을 것같다.
신륵사 은행나무 (수령 600년)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전 내부
신륵사의 극락전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이곳은 임시로 만들어 놓은 극락전이다.
다층석탑(보물 제 225호)
다층석탑 앞에 있는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은 지금은 터만 남았을 뿐 보이지 않는다.
극락전 기와불사를 하는 곳이 있는 것을 보니 해체보수 중인것 같았다.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정방형에 가까운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담한 건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한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신륵사 조사당 내부
조사당이란 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목조로 나옹화상의 상과 지공스님,무학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신륵사는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 진평왕 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말 나옹화상의 입적 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조선조에 새종대왕릉인 영릉이 여주로 이장한 후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영릉을 왕실의 원찰(願刹)로
중수하고, 현종(1671),영조(1726),철종(1858)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제 228호)
보제존자 석종부도는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종모양을 닮았다하여 석종이라 불리운다.
종 측면에 있는 석종비에 의하면 나옹화상의 입적 후 고려 우왕5년(1379)에 건립된 것으로
고려말 조사부도의 형식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석등(보물 제 231호)
보제존자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로서 화강암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는데
화사석은 납석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 229호)
나옹화상의 부도를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고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것이다.
비문은 '목은 이색'이 짓고 한유가 글을 썼으며 이인중이 새겼다.
여주 신륵사에는 유난히 '뱀딸기'가 많다.
초여름에 산속에 빨갛게 익은 것을 보면 그나름대로 예쁘다.
1982년 10월에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향나무(수령 600년)'
음식물 찌꺼기속에서 밥덩어리를 먹고 있는 얄미운 녀석 '청설모'
녀석도 여주쌀로 밥을 지은 것이 무척 맛있었나보다.
한국 관음성지 제31호 신륵사
토끼풀꽃
어린시절 꽃목거리와 꽃반지를 만들어 주던 친구가 그립다.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비문에 의하면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화상의 문도와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하여 세운것이다.
다층전탑(보물 제 226호)
다층전탑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벽돌에 새겨진 문양으로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강변 바위 위에 세워져있어 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눈에는 호법신장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이 전탑으로 인해 신륵사를 벽절(壁寺) 하기도한다.
삼층석탑
나옹화상의 다비를 기념하여 삼층석탑
강월헌(江月軒)
남한강변에 위치한 강월헌은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다비장소(화장터)
1972년 홍수로 옛건물이 떠내려간 이후 1974년에 재건축 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