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냉산(지금의 태조산)에 위치하고 있는 '도리사'를 10년전 부터 가보고 싶어 했는데
차일피일 하다보니 이제서 소망이 이루워진 것 같다.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절은 이곳 말고도 전국에 수없이 많다.
그러나 아직은 사는 것이 바빠서 뜻한대로 여행을 할 수는 없고, 수첩에 적혀 있는 가보고싶은 절은 많고
그래도 가끔은 시간을내어 수첩에 적힌 절에 갔다와서는 '갔다 온곳'이라고 동그라미를 치는 재미도
덧없는 세상을 살면서 느껴보는 작은 행복 같은 것이다.
구미 도리사 '일주문'
얼마전 까지만해도 이곳은 구미 도리사가 아니라 선산의 도리사로 알고 있었다.
1995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선산군이 '구미시'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도 나왔던 '선산 도리사'가 구미 도리사로 바낀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한것 같다.
도리사 경내로 올라가는 길이다.
앙상한 겨울나무 숲에 가려진 산사의 고즈넉함은 마음속 깊은곳 까지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도리사의 '반야쉼터'라는 곳의 내부
누구나 이곳에서 맘놓고 쉴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은것인지?
설선당 앞의 현수막에 써있는 글귀를 3번만 읽어보시길....
공양간은 아닌 것 같고, 요사채에 군불을 때는 공간인가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 말사 도리사의 종무소가 있는곳
태조선원
근대의 많은 선지식인들이 이곳에서 수행정진 하셨고, 성철 큰스님께서도 이곳 에서 수행정진 하셨다.
도리사 극락전(경북 문화재 자료 제318호)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이 지었다고 한다.
극락전은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선산 도리사 중수기(1876)에 따르면, 처음에는 금당암으로 있었던 것이 도리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경북 문화재 자료 제314호)
1600년에 만들어 개금한 것으로 몸에비해 머리가 크며 평면적이고,네모진 넓은 얼굴은
당시 불상조각의 양식을엿보게한다.
아도화상이 좌선 하였다는 '좌선대'
아도화상 사적비및 도리사 불량탑 시주비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효종6년)에 세운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사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도리사 불량탑은 불량탑을 시사한 시주와 전답량을 기록한 것으로 1712년(숙종38년)에 세웠다.
도리사 화엄 석탑 (보물 제 470호)
이 탑은 도리사 극락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3,3m이다.
일반 석탑과는 전혀 그 형태를 달리한 특이한 모습이다.
한적한 곳에 있는 스님들의 수행공간인지, 출입금지 팻말과 함께 <개조심>이라고 써있다
태조선원 댓돌 위에 놓인 털신과 흰고무신
이곳에서는 발소리도 내지말아야 한다.
아도화상 동상
아도화상은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의 아들로 일명 '묵호자'라고 한다.
신라 19대 눌지왕 때 19세의 나이로 어머니의 명에 따라 고구려로 부터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몰래 들어 왔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불교가 전파 되었는데 신라는 불교 포교의 박해가 심했다.
묵호자라는 이름으로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에 와서 모례의 집에 숨어서 불법의 진리를 3년씩이나 강론하였다.
그때까지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서 표교하기를 요청하여 처음에는 많은 미움을 샀으나 훗날에
소지왕의 신임을 얻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왕궁으로 돌아오던 아도화상이 산밑에 이르자 때가 겨울인데도 산허리에 복숭화꽃,배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거기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알려져 왔다.
적멸보궁 앞에 있는 법륜(팔정도)
법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가르침은 항상 구르는 바퀴처럼 끊임없이 일체중생에게 평등하게 돌아간다는 뜻이고
둥근 바퀴처럼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원만하다는 뜻도 있음
범종각(아도스님의 법음의 大鐘)
도리사 '적멸보궁'
1987년에 건립된 석가여래 사리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도리사 화장실 벽에 이런 액자가 눈에띈다. 원성스님께서 쓰신 글이다.
시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음은 얼마나 깨끗한 화장실인가 알 수 있을것 같다.
삼성각 앞에 있는 세존사리탑
1977년에 8세기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함과 사리도 발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