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사는 신라초기 인도 범마라국 사문(沙門) 광유성인이 창건하여 한때 임정사(林井寺)라고 불렀던
선종(禪宗)의 고찰이다.
광유화상이 부처님의 도량을 마련하여 오백제자를 교화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우리나라의 설화문학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이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하늘 기둥을 깍은 후 다시 승문에 들어간 원효대사에 의해
임정사는 '기림사'로 개칭되었다.
광유성인(光有聖人)은 인도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50년간 수도하면서 천안통,숙명통,타심통을 얻은 도인이다.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 말사이며 전통사찰로 지정된 천년고찰이다.
기림사 천왕문
함월산 기림사는 1911년 31 본산(本山)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한 60여개의 말사를 감리한 거찰이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교통의불편과 불국사의 복원으로 그 사세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지금은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되었으며 서산대사의 직전을 이은 스님들이 주지로 주석해왔다.
기림사 대적광전(보물 제 833호)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법당이다
이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조선 인조 7년에 크게 중수하였기에 17세기 건축흐름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중수할때 옛모습을 손상 시키지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자료가 된다.
기림사 대적광전의 꽃살문
기림사 소조비로자나 삼존불상(보물 제 958호)
기림사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소조비로자나 삼존불상으로 '삼신불'이라고 한다.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 우에 노사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배치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의 불상 형식으로 되어있다.
기림사 약사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
이 건물은 사적기(寺跡記)에 대적광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건기에는 조선 효종5년(1654)에 중창되었다고 적혀있다.
숙종4년(1678)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므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림사 약사전 삼존불상
약사전의 약사여래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삼존불'은 당초 조선시대 후기
혹은 일제시대 작품 소조불로 알려져 왔으나, 삼존불을 옻칠하는 과정에서 덫칠을 벗겨낸 결과
그 밑에서 통일신라시대 채색 소조불이 밝혀지면서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기림사 응진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고려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05호)
이곳은 아라한을 모신건물로 대적광전을 중심으로하여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선덕여왕때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조선 후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18세기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갗추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조선 중기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응진전을 '나한전'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으로는 영천 거조암, 영산전을 포함하여 경주 기림사 응진전이 유명하다고 한다.
나한님들의 표정과 웃음을 눈여겨 보게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
나한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시고 그 좌우로
16나한 등을 모셔 영산회상을 나타낸다.
물론 삼존불도 없이 나한만 모시는 경우도 있지만,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도는 나한탱화를 모시기도한다.
경주옥석을 재질로 만든 석조 오백나한상 이다.
요사채가 너무 고즈넉하다.
범종각
기림사에는 아직 연등다는 작업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얼기설기 연등을 달기위한 전기줄이 거미줄 처럼 얽혀있다.
삼천불전 앞의 넓은 마당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향나무가 있다.
지금은 연등을 달기위한 전기줄에 갇혀 있는듯 하지만 연등이 마당 가득 달려 있게 되면
푸른 잎 위로 숨쉬기운동을 겨우 해야할 것 같다.
기림사 명부전과 삼성각
명부전은 영험있는 지장보살상과 지장 시왕상 그리고 지장 탱화가 전하여 지장기도의
참배객이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기림사 관음전
기림사는 우리나라 33관음성지 중의 한 곳이다.
조계종 한국불교 문화사업단은 한국 관광공사와 공동으로 지난 2007년 '33관음성지'를 지정했다.
이어 지정된 33곳의 사찰을 관음사찰 순례지로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일본은 물론 전세계 외국인들의 성지순례를 통해 우리나라 관음불교를 세계화 한다는 구상이다.
일본의 경우 10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사찰 순례문화가 있다. 관음성지순례는 그 중 대표적이다.
350곳이 넘는 관음성지순례에는 연간 성지 순례객 규모가 700만~800만명에 달한다.
일본은 불교가 민속신앙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현세에 구복을 발원하는 우리나라 관음신앙과 달리 일본 관음신앙은 사후 정토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경향이다.
사후를 위한 준비로 여기고 '33관음성지'를 순례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사찰 순례시 하나씩 찍은 도장첩을 죽은 뒤 관속에 넣어 매장하기도 한다.
기림사 관음전의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은 관음보살의 대자비와 방편을 상징한다.
그러나 실제 조각된 숫자는 마흔개이다. 그 하나 하나 손들이 25유를 구제한다고
보기 때문에 40x25=1,000수가 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은 연꽃을 들거나 정병을 잡고 있는것이 대부분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같은 경우는 저마다의 손들이 구슬,도끼,활,법륜 등의 물건을 손에들고 있고
그 손마다 눈이 달려있다.
천수관음에대한 신앙은 고려 이후 '천수경'보급과 함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영당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선생은 세종17년(1432) 서울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하였으나 단종3년(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세조10년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후 성종2년(1471)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환속하였다. 성종24년(1493)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시호는 청간이다.
본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가 선생의 뜻을 추모하기위해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5년에 훼철되었고,고종15년에 경주유림이 경주부윤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지었으나
퇴락하여 1998년 경주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매년 음력 2월에 중정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진남루와 기림사 종무소건물
진남루(문화재 자료 제251호)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지휘본부로 사용된곳이다.
기림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절에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다섯가지 빛깔의 우담바라라는 꽃이 핀다고 한다.
또한 예로부터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다.
하늘에서 단 이슬같은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으뜸이라는 '북암의 감로수'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후원의 화정수'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3층석탑 곁의 장군수
마시고 씻으면 눈이 맑아진다는 '천왕문 앞의 명안수'
물빛이 너무좋아 까마귀가쪼았다는 '천왕문 안의 오탁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 장군수는 조선시대 이곳에서 역적모의가 발견되어 나라에서 삼층석탑을 옮겨
샘의 물줄기를 막아 버렸다는 이야기들이 기림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기림사는 왜구가 동해를 거쳐 서라벌로 침입하는 길목에 놓여 호국사찰의 구실을 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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