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여행

창덕궁 낙선재에서

nami2 2024. 12. 13. 22:52

궁궐 중에서 창덕궁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30여 년 전 부터 였었는데
그것은 창덕궁 후원(비원)이 아니라 '낙선재'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벌레라는 별명 탓인지?
공교롭게도 마지막 황태후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여사, 덕혜옹주 까지
많은 책들을 모두 읽었는데

그분들이 모두 낙선재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 했다는 것이
나의 큰 관심꺼리 였었기에, 낙선재는 꼭 가보고 싶어 했었던 궁궐이었다.

그 당시에 다른 고궁들은 모두 관람이 가능했으나
창덕궁 낙선재 만큼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 되었다는 것에 마음을 비웠었다.
그러나 몇해 전 일반인이 출입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것은 제한적인 인원의 예약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어렵사리 이번에 창덕궁에 들어가보니까
낙선재는 예약없이 갈 수 있었다는 것이 황당하게 했다.
내게는 창덕궁 후원(비원)보다는 낙선재가 진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건만
그동안 서울에 갈 때마다 차일피일 여동생이 예약 해줄 때 까지
눈치를 봤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억울했고 아쉽기만 했었다.

낙선재 앞의 나무 숲은 창덕궁 후원 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낙선재 앞 마당가에는 감나무의 감들이 주렁주렁

붉게 익어가는 모습이 보기좋았고
형형색색의 단풍도 황홀 할 만큼 예뻤다.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으로 들어가봤다.
장락문 현판은 흥선대원군 글씨라는데
유감스럽게도 현판 사진을 찍지 못했다.

1847년(헌종13년)
헌종이 서재겸 사랑채로 지었다는 낙선재이다.
헌종은 낙선재에서 머물렀고
후궁인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낙선재는 헌종이 머물다가 1849년인 2년 뒤에 붕어 했으며
그후 갑신정변 직후에는 고종이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유학 가기 전 머물렀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순종이 이곳에 가끔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접견 했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 이후,내전을 재건 할 때 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순종이 붕어 직전에는 순종의 어전을 이곳에 모시기도 했었으며,

순종 사후에는 순정효황후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20여년을 잘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는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이 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서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해서
서울 정릉의 인수재에서 잠시 머물다가
1960년 4,19 이후, 이승만 하야 후에 이곳 낙선재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나중에는 영친왕과 이방자여사가 일본에서 돌아와서는
영친왕 부부가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으로 옮겼다고 한다.

보소당은 헌종의 당호이기도 하며
소식(蘇軾)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뜻으로
헌종이 소식을 많이 흠모했던 것 같다고 한다.

낙선재 누마루 내부인데...
누마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이 나있고
그 뒤로 온돌방이 있으며
마루와 온돌방 사이에는
둥근 모양으로 문을냈다.

내부의 창살 모양의 문은
각 방 마다 다르다.

비 내리는 날의
긴 꽃담이 단아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낙선재의 행랑채

낙선재 내부의 각 방 마다
문 창살은 만(卍)자 살, 아(亞)자 살

정(丁)자 살을 비롯하여
당초 무늬, 박쥐 무늬, 마름모 무늬

고리 무늬 등으로
상당히  개성 있고 아름답게 꾸몄다.

낙선재 건물 뒤편으로 나가는 문

낙선재 건물 뒤편에는
계단 정원 '화계'가 있었는데
풍광이 굉장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데
전돌을 쌓고 장식한 문과
담장, 굴뚝 ,괴석, 석지 등을 세웠다.

수강재의 툇마루가 붙은 건물이 인상적이다.

수강재의 '수강'은 오래살고 건강하라는 의미
1785년 정조 때 지어진 건물로
낙선재 권역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수강재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돌아와 머물렀던 곳으로
덕혜옹주는 1925년12살 나이에 일제에 의해
강제 유학길에 올랐다가 1962년에 38년만에 귀국하여

수강재에서 지내다가 1989년에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가 죽은 10일 뒤에
이방자여사도 수강재에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수강재는
어린 왕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돌봤던
헌종의 할머니인

순원왕후의 처소로 사용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석복헌은 1848년 헌종 때 지어진 건물로
후궁 경빈 김씨가 머물던 곳인데...

조선왕조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가

1966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석복헌 동쪽의 작은 문으로 나가면
수강재로 드나들수도 있었다고 한다.

창호는 낙선재 석복헌과 달리
단순한 정(井)자 살의 띠를 창호로 꾸몄다.

낙선재는 조선왕조의 황실 가족들이

1989년 까지 살았던 곳으로
가장 최근 까지 사람이 살았던...
궁궐 전각 중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이라고 한다.
낙선(樂善)의 뜻은 '선을 즐긴다' 라고 했다.

낙선재는 2012년 3월에 보물 1764호로 지정했다.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총12칸이며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더 나았기에

실제로는 총15칸이라고 했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는 옛궁궐 건물이 아니라

조선 왕족들이 살던 살림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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