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봉두산 서쪽 자락에 위치한 고찰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 2월에
신성한 승려 3명이 처음 세웠다고 , 동리산 태안사 사적기에서 전해온다.
그 뒤, 1대조사 혜철선사가 당나라 서당지장에게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개창하였다.
풍수지리상의 원조인 2대조사 도선국사는 태안사에 10년간 머물며, 혜철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고려시대에 3대조사 광자대사가 절을 고쳐지었는데, 이때는 건물 40여동이 110칸에 이르는 규모였으며
법당에는 높이가 1,4m인 약사여래불을 모셨다고 전하며, 그후 고려 고종 10년(1223년)에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10년(1684년)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면서 완당을 건축 하였으며, 대바라를 만들고
완당완기를 남겼다고 한다.
천년고찰 태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 말사이며,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23호이다.
태안사 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83호)
동리산 태안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은 능파각과 함께 6,25때 불태워지는 것을 피한 건물이라고 한다.
태안사 부도탑
광자대사탑비(보물제275호)는 고려광종1년(950년)에 세운 비석
광자대사탑(보물제274호)
광자대사탑은 동리산문의 3대조사인 광자대사 윤다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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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회당
삼성각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세사람의 신승(神僧)에 의해 창건된 태안사는
고려태조 2년 (919년)에 광자대사 윤다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로 중창했다고 한다.
개산조인 혜철국사가 주석하며 법회를 연 이후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쇠퇴하기 시작 했으며,
6,25전쟁때는 일주문과 능파각 보제루, 해회당 선원, 염화실을 제외한, 대웅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이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염화실과 적인선사 조륜청탑으로 가는 길
주지스님이 계시는 염화실
선원
적인선사 조륜청탑으로 들어가는 '배알문'
적인선사 조륜청탑(보물 제273호)
적인선사는 785년( 신라 원성왕1년)에 태어나서 861년에 입적한 태안사의 개산조사인 혜철선사이며
부도의 건립시기는 혜철선사가 입적한 861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높이 3,1m의 부도는 사찰 중심을 약간 벗어난 북쪽 언덕에 있는데, 흙담장을 쌓고
그 안에 탑비와 함께 나란히 서있다.
적인선사탑비
봄날의 따사로움이 정겹게 느껴지는 태안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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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채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의 유서깊은 고찰 태안사는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고쳐 지었는데
또다시 한국전쟁으로 대웅전이 불타는 등 피해를 크게 입었으며, 일주문과 능파각
보제루, 선원, 미타전(염화실)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은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