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여행

서울 창덕궁을 돌아보며...

nami2 2024. 12. 17. 22:45

서울 여행에서 창덕궁에 다녀온지 어느새 20일이 되었지만
이런 저런 일로 자꾸만 미루다보니 이제서 밀린 숙제를 해본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에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되었다.
창덕궁은 대한민국의 사적12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이탈리아 나풀리에서 개최된 제21차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자연스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이 주요 거처로 쓰인 궁궐이라고 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에 지어져서 광해군 때 부터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광해군 이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 할 때 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활을 담당 했으며

조선 후기 대부분 정치적 사건의 배경은 창덕궁이었다고 한다.

창덕궁 돈화문(보물 제383호) 앞의 나무는

이미 잎이 흔적없이 떨어진 상태여서

아쉽기만 했었던 은행나무였다.

이 나무는 470년 된 은행나무로
서울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중의 하나라고 했다.

창덕궁 담장 밖에서 보여지는 세그루의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화나무로서
3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나무라고 한다.

창덕궁 회화나무 군은 천연기념물로
돈화문 주변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고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길게 늘어선 회랑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인정전은 언뜻 보기에는 2층이지만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18년)에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1610년(광해군 2년)에 재건 되었으며
1803년(순조3)에 소실 된 것을
이듬해 복원해서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인정전(국보 제225호)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 하던 곳이다.

낙엽이 거의 떨어져 내린 고목 나무가
궁궐 마당을 호위무사 처럼
지키는 모습이 멋스럽게 보여졌다.

인정전 앞 뜰에 있는 품계석은
정조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품과 계로 나뉘는데 품은 양반으로  
모두 각각 정1품 부터 종9품 까지
18품이 있으며
계는 상 과 하의 두계가 있다고 한다.

인정전의 내부에는
일월오악도 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의 다섯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고 했다.

비 내리는 날의 창덕궁 선정전 모습

선정전(편전)의 어좌에
일월오봉도는 국왕을 상징한다고 했다.

선정전에서 바라본 대조전의 모습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다고 한다.

선정전에서 내부에 있는 문으로
희정당의 현판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창덕궁 희정당으로 들어가는 곳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때 희정당으로 바뀌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희정당은 또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불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 한 것으로
원래의 희정당과 다르다고 한다.

희정당 앞쪽에는
자동차를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고 한다.

성정각은 창덕궁의 동궁(東宮)에 속하는 전각으로
세자가 학문을 익히던 곳이며
한때는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의 목조 건물로서
희정당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왼쪽 부터  마루 2칸, 방 2칸을 두었고
오른쪽에는남 북 3칸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성정각 남쪽에는 보춘정이 있고

성정각 동쪽으로는
희우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희우루(喜雨樓)라는 이름은
1777년(정조1년) 성정각의 누각을
고쳐 지으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현판의 글씨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희우루 앞의 계수나무 노란 단풍이 

전각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보춘정 내부로 보여지는 바깥 풍경

희우루는 정조 임금 재위 당시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던 때에
이 누각 공사를 시작한 날과 완성한 날에
비가 내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희우루(喜雨樓)라는 편액은
정조 임금의 친필로 알려졌다.

성정각의 보춘정,희우루 누각은
단청으로 절제된 화려함이 잘 드러나서
궁궐 단청으로 쓰이는 모루단청으로
품위있게 잘 꾸며졌다고 한다.